평등한 사회에 대해 반론은 다음과 같이 제기될 수 있다. ‘평등은 개인의 독립과 상충된다.’인간은 공동체라는 개념 속에 수동적인 도구로 전락하고 겉으로 자유를 얻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노예로 살아가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이다. 반론의 핵심을 이해하려면 두 가지 독립을 이해해야 한다. 하나는 자연적 독립이고 다른 하나는 도덕적 독립이다. 자연적인 독립은 이성과 판단력의 통제를 제외한 모든 형태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를 의미하며 지성 향상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이에 반해 도덕적 독립은 유해한 요인을 내포한다. 건전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상호의존적이어야 하지만 현대인들을 이것을 마냥 좋아하지 않는다. 상호의존적 관계를 통해 스스로의 행위를 교정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움받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든 것을 은밀하게 처리하는 것을 좋아하고 성급함과 반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도덕적 독립을 원한다. 이는 공공의 행복에 커다란 장애물이다, 인간은 이성적으로 행동하며 서로 행동을 솔직하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와 동시에 개인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다. 만약 전자가 후자의 자유를 억압한다면 위의 반론 주장은 타당성을 얻을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인간의 상황보다 내면이 더 중요하다.겉으로만 자유로운 것은 큰 가치가 없다. 내적 성품을 갖춘 사람이면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고요한 평화 속에서 늘 남을 배려하고 살아간다. 자유란 이런 내적 성품을 형성하고 유지해나가는 수단이다. 따라서 이런 내적 성품 없이 정의롭지 못한 세상을 바꾼다는 생각은 오만한 생각이다. 내면의 개혁이 이루어지면 자유는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독립은 인간의 타고난 권리이다. 노예와 자유인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노예의 평화와 위로는 다른 사람의 말에 달려있다. 노예가 되는 것은 각자 선택에 달려있다. 가진 것 없이 불행히 다른 사람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고 해도 독립심을 잃지 않을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은 그 누구를 대하더라도 당당하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한다. 세상이 그 사람들을 노예라고 부를지라도 사실 그들은 자유를 소유한 엄연한 자유인이다. 무정부 상태를 폭력적인 양상을 띠는 무질서 상태로 이해하는 입장과 정부 없이도 훌륭한 사회질서가 유지되는 상태로 이해하는 입장은 서로 크게 다르다. 국민들이 정치적 자유의 개념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정부가 해체된다면 폭력이 난무하는 무질서 상태가 될 것이다. 무질서 상태는 혼란을 야기할 수 있지만 금방 사라질 것이다.
무정부 상태의 해악의 첫 번째는 개인의 안정일 것이다. 주변에 원한을 산 사람에게 살해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빠질 수 있다. 최악의 무정부 상태에서는 대다수 사람들이 남들이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살고자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이웃의 시기심이나 의심을 자극하게 되면 난폭한 사람들에 표적이 되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오히려 똑똑하고 관대하고 담대한 이른 죽음을 맞이할 가능성이 높다. 물론 가끔 지성의 빛이 발현되기도 하겠지만 일시적일 뿐 금방 사그라들 것이다. 통제되지 않는 열정은 평등을 지향하지 않고 권력의 욕구를 자극할 뿐이다. 이러한 혼란에도 불구하고 무정부 상태의 해악이 사회의 해악보다 더 나쁘다는 것은 성급한 결론이다. 개인의 상태는 무정부 상태보다 독재 상태일 때 더 보장받기 어렵다. 왜냐하면 무정부 상태는 일시적이지만 독재상태는 영구적이기 때문이다. 무정부 상태는 생각을 일깨우고 사회 전반에 활력과 진취적 정신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강제적인 무정부상태는 최선 상태일지라도 이러한 활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무정부 상태의 종착점이 어디인가 하는 것에 대한 물음에 답은 여러 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우선 무정부 사회는 독재로 귀결될 수 있다.
한편 무정부 상태는 독재 상태를 변형시켜 이전의 사회 형태보다 좀 더 평등하고 온건한 사회 형태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 아울러 무정부 상태는 철학자가 상상할 수 있는 완전한 형태의 사회를 만들어 낼 가능성도 없지 않다.사회는 자체적으로 질서를 갖추려는 속성을 지닌다. 누군가를 괴롭히거나 다른 사람을 방해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자신의 일을 하면서 오히려 예절을 갖춰 도움을 주려고 할 것이다. 인간이 타락했다는 과거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어느 나라든지 폭력과 약탈행위를 저지르는 범죄자가 있기 마련이고 이걸로 전체 인류를 매도하는 행위는 옳지 못하다. 인간 사회를 보면 강제적인 법률 없이도 서로 집단 사회를 구성하고 잘 살아갈 수 있다. 법률은 일부 나쁜 사람들이 대다수 선량한 사람들을 위협하지 않도록 하는 예방책에 불과하다. 지금보다 발전돼 미래의 사회 형태를 모습을 생각한다면 인간의 기능이나 희망은 어느 나라나 다를 바 없기 때문에 비슷한 형태의 사회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 각 지역마다 독립적으로 자기 지역을 관할하는 형태가 이상적이다. 그 이유는 마을 사람들끼리 서로 관심사를 잘 알 수 있기 때문에 그에 맞는 평등한 조율이 완벽하게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규모가 작은 지역은 치안 유지를 제외하고 확대된 권력기관이 필요 없다. 정부라는 추상적인 이념이 포괄하고 있는 유해 요인들이 권력에 확장된다. 따라서 권력을 최소 하는 것이 필요하다. 개인이 야심도 유해 요인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지만 권력이 최소화되고 분산된 상태에서는 그것이 싹 틀 여지가 없다.
편협한 공화주의자들이 평범한 삶을 강조한다면 지성의 힘은 활력을 잃게 될 것이라고 반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논의는 온 인류가 하나의 공화제를 이룰 것이고 위대한 지성을 근거로 선량한 행동하기를 원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금보다 활기를 띨 것이라는 가설에 근거한다. 국가를 소단위 지역으로 구분하고 의회에 각 지역 대표를 파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면 각 지역 내부 문제를 그 안에서 해결한다고 하더라도 공공의 안전을 위협하는 잘못된 결과를 야기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소단위로 이루어진 연맹 형태를 이루어 서로 협력을 구하면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다. 정치권력이 시민들에게 이양되고 지역 자치단체 형태로 단순해진다면 서로 오해하거나 경쟁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정부의 합법적 목적은 단 두 가지이다. 하나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개인에 대한 부당행위를 제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외부의 침입에 대비해 공동의 노력을 기울여 국가를 보전하는 것이다. 첫 번째 목적은 각 지역에서 충분히 해결될 수 있다. 각 지역은 배심원단을 구성해 범법자를 처리할 수 있다. 범법자가 다른 지역으로 도망갈 수 있지만 얼마든지 다른 지역과 협력해 범법자를 몰아낼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목적을 위해 성문화 된 법이나 기관을 세울 필요는 없다. 일반적으로 정의와 상호 관심이 법보다 인간을 결속시키는데 더 효과적이다. 사람들이 결속하면 범법자를 처벌할 필요가 없으면 동기조차도 사라지게 된다. 소규모 공동체에서는 각 개인의 행위 하나가 다른 사람에게 드러나기 때문에 법률적 장치가 필요 없다. 그 누구도 자신의 행위에 대해 다란 사람을 의견을 무시한 채 악을 고집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 행동은 본인을 죄책감 빠뜨리는 행위일 뿐이다. 지역 간 연맹을 공고히 하려면 평등의 원칙과 중용의 원칙을 따라야 한다. 만일 그런 원칙이 깨진다면 어느 사회에 속해 있든지 구성원으로서 합당한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지역과 지역 사이의 갈등은 여러 지역이 동맹을 맺고 정의 원칙을 선언하고 강화화는 노력에 의해 극복될 수 있다. 지역 간 지역 대립과 외국의 침입이라는 두 가지 경우에만 서로 힘을 합쳐 만인의 이익을 보호해야 하지만 그러한 일은 자주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영구적으로 필요하지 않다. 즉 이런 비상사태를 제외하고 가능한 지역 간 소집을 자제해야 한다. 위에 제도들은 도입하려면 수정된 형태의 국회에 어느 정도의 권한을 부여할 것인지 정할 필요가 있다. 의회가 인격적인 특성을 바탕을 둔 권한 외에 아무런 권한을 소유하지 않을 때 파벌을 조장 한 요인들이 사라지고 대중들의 소요가 가라앉고 정치체제가 단순해짐에 따라 이성의 목소리가 더욱 뚜렷해질 것이다. 인간이 사악한 본성을 가졌다는 것은 근거 없는 가설이기 때문에 합리적인 설득에 귀를 기울이게 되어있다. 모든 영역에서 정의의 원칙을 준수하되 맹목적인 신념을 버리고 모든 사람들이 합리적인 성품을 갖추길 기대할 필요가 있다. 모든 강제수단이 사라지고 오로지 이성의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사회가 온다면 모든 법적 장치들이 불필요 해질 것이다.
정부는 오히려 이런 합리적인 기대를 무시한 채 악을 종용하는 야만적인 제도이다. 자유로운 이상 사회는 모든 사람들이 육체적 노동을 이행한다. 자유로운 사회에서 각 개인인 30분만 육체노동을 투자하면 전체가 사용할 수 있는 생필품을 충분히 생산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러면 여가시간이 증대될 것이며 여가시간이 확보되면 지성 계발에 자연히 관심을 기울이게 될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공공의 선을 증진시키는 결과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불필요한 협력, 즉 공동노동과 공동식사와 같은 것은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다. 단순한 노동의 협력은 동정심에 비롯한 협력보다 더 큰 해악을 일으킨다. 문명의 이기들로 인한 생산성 증대는 모든 사람들을 일을 함으로써 노동으로 인한 고통이 사라지게 할 것이다. 자유 아랫사람들을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면 강압적인 통제나 규정이 불필요하다. 자유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자연스레 단합이 이루어지고 다른 사람을 배려할 마음도 생긴다. 자유로운 사회의 진보는 모든 사람들의 진보를 의미한다. 개인을 두루뭉술한 집단으로 만들어 기계처럼 부리기 쉬운 존재로 만드는 것은 옳지 못하다. 그렇나 인위적인 현상이 사라져야 진정한 의미의 협력이 이루어질 것이다. 모두가 자연이 주는 축복을 공유하며 풍성한 삶을 사는 사회는 개인의 편협한 이기심이 설 자리가 없다. 지구가 인구를 더 이상 수용할 수 없으며 아이를 낳지 않게 되고 진리를 둘러싸고 일어난 세대 간의 교차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며 전쟁, 범죄, 정의를 집행할 기관도 필요 없는 일체 통치행위가 없는 사회가 올 것이다. 모든 사람이 만인의 선을 추구하기 때문에 질병, 고통, 고뇌, 분노도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인류 진보의 주체가 되어 각 개인에게 주어진 재능을 이용해 전체를 위해 기여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노력의 동기부여가 필요 없다. 이미 자유로운 사회를 맛본 사람들은 그러한 행복을 스스로 더 추구해 나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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